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는 이어령님의 시집입니다. 생명과 삶 그리고 죽음 그 안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생 아이 무릎에 앉히고 같이 읽었습니다. 아이가 너무 재미있어하며, 시에서도 배우는 게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쉬운 책만은 아닌데 아이 눈높이에 멈추어 같이 들여다본 것들 몇 개 남겨봅니다. “서문: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는 모르고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2022년 2월 22일 이어령” 고인이 되신 날이 2월 26일. 그날의 4일 전인 2월 22일에 남기신 흔적입니다. 그 흔적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려봅니다 “젓가락의 의미: 왜 서양 사람들은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할까요? 그것은 모든 음식이 덩어째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왜 서양사람들은 여러 개의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할까요? 그것은 앞에 나오는 음식과 뒤에 나오는 음식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음식을 먹는 사람을 생각해서 먹을 것을 한입에 들어가도록 잘게 썰어주면 포크와 나이프 없이 젓가락만 가지고도 먹을 수가 있지요 부엌의 도마 위에 식칼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데도 덩어리째 나오는 비프스테이크를 먹으려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칼이 필요하지요 여러 음식을 한데 섞어 비벼 먹는 비빔밥, 여러 음식을 한데 싸서 먹는 보쌈이라면 젓가락 하나, 숟가락 하나, 맨손으로도 충분하지요” 아이에게 질문을 던져보세요. 젓가락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세요. 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다: 어제란 말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오늘이란 말도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그러나 내일이란 말은 올 래來 자 날 日 자, 한자 말에서 들어온 말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말인데 어째서 내일이란 말만은 한자 말로 되어 있을까요? 순수한 우리말이 있었을 텐데, 어째서 가장 소중한 내일이란 말을 잊었을까요? 어째서 가장 희망을 주는 내일이란 말을 빼놓았을까요? 그러나 걱정하지 맙시다. 정말 내일을 생각하면 앞이 안 보이는 일이 많지만 어둡고 괴로운 일이 많지만 내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보다 더 먼 미래가 보이고, 더 밖은 앞날이 보입니다. 걱정하지 맙시다. 내일보다 더 먼 미래를 뜻하는 말, 모레란 말이 있잖아요 그리고 모레보다 더 더 먼 미래의 글피와 그글피란 말이 있잖아요. 내일과는 달리 순수한 우리말이잖아요 내일은 없어도 모레가 있다고 말해보세요. 내일은 없어도 글피와 그글피가 있다고 말해보세요. 품 안의 아기가 웃을 겁니다.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믿었던 56억7천만년 뒤에 부처님이 되신다는 미륵보살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어제, 오늘, 내일, 모레를 가지고 이런 깊은 생각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런 생활 속 관찰과 통찰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사자의 눈: 짐승 가운데 인가의 눈을 제일 많이 닮은 것은 무엇일까요. 동물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사자라고 합니다. 힘이 센 백수의 왕이라서 그런 것을 결코 아닙니다. 사자는 들판에서 사는 짐승이라 언제나 먼 지평을 바라보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초식동물들은 발밑에 있는 풀만 보고 다니지요 눈의 시야가 아주 좁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자와 비슷해도 호랑이는 정글에서 살기 때문에 먼 곳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눈의 생김새나 인상은 사자와는 아주 다릅니다. 두 발로 서 있는 인간은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며 삽니다. 인간은 멀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입니다 ‘지금,여기’가 아니라 항상 먼 내일과 넓은 세계를 꿈꾸며 살고 있는 사람들. 귀여운 자녀들은 상상과 지식의 넓은 초원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먼저 푸른 지평선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아이는 이 시를 제일 좋아했어요. 사자라는 동물에 대해서 지식 책에서는 보지 못한 내용이었고 그 풀이가 얼마나 와닿게 인간적이던가요. 이어령 선생님이 보고 싶습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이: 콩나물시루에 물을 줍니다. 물은 그냥 모두 흘러내립니다. 퍼부으면 퍼부은 대로 그 자리에서 물은 모두 아래로 빠져버립니다. 아무리 물을 주어도 콩나물시루는 밑 빠진 독처럼 물 한 방울 고이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콩나물은 어느새 저렇게 자랐습니다. 물이 모두 흘러내린 줄만 알았는데, 콩나물은 보이지 않는 사이에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물이 그냥 흘러버린다고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것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이 시를 보고 아이는 자신의 생일 선물로 콩나물시루를 사달라고 했고, 이 시를 읽은 나는 콩나물시루의 한없이 흘러주는 물과 같은 존재가 되리라 다짐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주리라. “혀가 이겨: 이와 혀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니? 이 왜 이가 이겨? 이는 딱딱하고 혀는 말랑하니까 이는 혀를 물 수가 있어 하지만 혀는 이를 물 수 없어 정말일ᄁᆞ? 할아버지, 할머니의 입을 보았어! 딱딱한 이는 빠지고 삭아서 몇 개 남지 않았지만, 혀는 옛날 그대로거든 딱딱한 이가 힘도 세고 오래갈 것 같지만...”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듯이 오늘도 부드럽고 단단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야겠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 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큇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마음이 아려오는 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장면들 추억의 무게들이 오늘의 삶을 채우는 느낌이다. “생각하지: ‘사랑’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생각’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생각한다는 것을 사랑한다고 했지요 희랍말도 그래요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오래 생각하는 것이고, 참된 것은 오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줍시다. 어머니가 읽어준 동화 한 편, 어머니가 불러준 노래 한 곡조, 어머니가 꽂아준 꽃 한 송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갖지 못한 이처럼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생각과 사랑 그 은은한 향이 느껴집니다. 저는 이 시가 참 좋더라고요. 이렇게 추억이 전해지며 우리 삶이 기억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사랑이겠지요.